인위적인 정부의 경기부양정책이 경기부양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을 위시한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국가들은 지금 정부의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과거 다양한 형태의 경기 부양책을 내어 놓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으로 안다.
보통 그 첫 걸음은 추경예산 편성을 통한 자금의 긴급조달을 통하여 사회간접 시설 투자 사업 확대 즉-(SOC)-
국가 기간 산업망 확충에 대한 투자 확대를 통한 신규 일자리(임시직,일용직 포함) 창출에 일차로 먼저 투자하는 편이고,
그리고는 중앙은행에 일차적으로 국가재정을 풀어서 일반 은행으로 넘어가게 하여 시중의 통화량을 많이 품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으니 자연스레 가계의 소비가 촉진 또는 진작될거라고 하는,
구시대적인 경제학 개념의 틀을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 할길 없다.
보통 어떤 나라든 경기부양책을 들먹이고 나오는 시점의 대부분을 보면 서민경제의 탄탄한 저축율확대에 기초한 소비여력의 증대가 일차적인 소스로 작용하여
자율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호경기속에서의 소비진작을 통한 내수확대나 국내경기 부양을 써야함이 원칙일진데도,
거의 대다수 국가들은 국내경기가 최악일 때 비로소 사탕발림같은 경기부양책을 내어놓는답시고,서민경제나 가계의 소비여력이 제로상태이거나 마이너스 시점일 때 들고 나오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정부의 선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과소비를 부추기게되고, 급기야 가계빚만 가중시켜 오히려 서민경제나 가계부채의 증가요인으로 역작용하여 갈수록 가계의 소비여력을 떨어뜨리게 하는 플러스 알파요소로 작용하게 되고, 그 결과의 대부분은 장기적인 국내,외 경제 제반 상황들을 자칫 잘못하면 더 악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많이 보았다.
둘째로 경기부양책을 내어놓는 시점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의 경우 I.M.F 이후에 카드남발로 인한 카드대란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리먼브라더스 사태나 또는 작금의 이슈가 되고 있는 유로존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국가채무불이행 상태 직전에 놓이거나,또는 국내 실업률이 최고점에 달하여 가계부채가 최악일 경우나 또는 부동산 버블 즉 부동산 가격이 최저점으로 떨어져서 국내 부동산 경기가 최저점일 때일수록 정부나 정책입안자들은 한결같이 현실속의 소비자들의 가계부채지수와 소비여력지수는 무시한 채 마치 내일 당장이라도 추경예산을 빨리 풀고 사회 간접 자본 시설 투자를 촉진하면 임시직,일용직,장기 근속직 근로자가 늘어나서 수치상으로는 실업률 감소라는 그럴싸한 과대포장기법으로 그 시점의 국민과 여론의 압박을 우회적으로나마 만회시키려고 하는 사례를 우리는 국내외의 여러 사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그 동안의 수 많은 경기 부양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은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서민들과 국가부채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의 부채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차라리 이와 같이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경기 부양책을 쓰기 보다는 국민들로 하여금 알뜰 소비문화를 독려하고 그런 연후에 점차적으로 저축율을 확대시키도록 유도하고, 그러한 국민의 근검절약정신과 저축률 증대를 바탕으로, 지방과정부의 재정과 세수를 늘려나가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국민에게 자연스런 소비 진작책을 들고 나오면서 ,국내경기적으로 기업들이 왕성한 생산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귀결되게 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의 재정이 안정화 되면, 그 때 가서야 대외적으로도 좀 더 자연스럽게 잘 다져진 국가경제의 기초를 근간으로 자유무역주의의 확대를 논한다면 어느누가 그런 성공사례를 보고 본받고자 아니하겠는가 말이다.그러기에 19대국회와 현정부와 차기정부는 성과주의적 착시복지국가를 보여주기에 앞서
능률과 실질에 본바탕을 둔 냉철한 현실직시를 통하여 다시금 국민들로 하여금 저축률 증대를 통한 가계와 기업과 정부와 국가의 내실다지기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 지금이 아닐까 생각하며 제발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의존하지말고 국리국략과 각자 생활고에 시름하며 밤 잠 못 이루는 불쌍한 민초들의 가녀린 숨소리에 제발 하루 빨리 귀 기울이시기를 간절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