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아버님의 말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옛날 해방이 된 후에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오셔서는 경상도에서 터를 잡으셨는데,
오자마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여러 형제들이 각자 먹을거리를 구해 오는데 요즘의 표현으로 보리쌀 한 바가지를 얻으려면 부잣집에 소를 삼 개월이나 봐 줘야
보리쌀 한 바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신다.그리고 그 보리쌀도 여러 형제들이 먹으려면 마음껏 드시지 못하고 물은 흥건하게 넣고, 보리쌀을 앉힌 것과 또 다른 거섶 이것 저것을 넣어 양으로나마 물배 채우는식으로 허기를 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군대를 가셔서는 삼년동안 월급 한 푼 안 써시니까 나중에 제대 할 때,쌀 한 가마니가 되더란다.
그런데 워낙 형제가 많다 보니 쌀 한 가마니가 채 두 달도 안 되어 동이 나더라는 것이다.
2.위와는 다르지만 학창시절 우리 교련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면 다음과 같은 실화도 있다고 한다.
6. 25때 우리군이 흥남부두에서 철수할 때 한 병사가 일주일간이나 낙오된 일이 있었는데,그 한국군은 추위의 공포보다 배고픔의 공포가 더 커서
결국엔 먹을것이 동이나서 자기가 신고 있던 소가죽으로 된 군화를 세 번 정도 끓는 물에 담가서 우려내고는 네번째 부터 그 우려낸 물로 허기를 채웠다는 실화도 있다고 한다.
3.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신혼을 시작할 때 거의 대다수가 숟가락,젓가락부터 시작해서 단칸 셋 방에 이불 하나로 네 식구 다섯식구 한 이불을 덮고, 단칸 셋방 부터 시작해서 전셋집 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 자기집을 지어시는 게 보통의 관례였다.
그리고 여행도 친구분들끼리 계중을 모아서 30~40 대 때에는 그냥 부산이나 대도시를 관광하셨고, 50~60대에 이르러서야 제주도나 홍도나 울릉도에 가셨고, 해외여행은 60~70대에 다다라서야 해외여행을 가셨다.
4.그러면 요즘의 나를 비롯한 우리세대는 어떠한가? 해외여행을 60~70대가 아닌 초중고의 수학여행 중 하나로 가고 있고,결혼도 전세나 사글세가 아닌 아예 아파트와 자동차부터 시작하고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편차에 따라서 그리고 국민들 각자의 개개인의 부의 정도에 따라서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경향은 이 범주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요즘 촌의 어른들을 잠깐 보면 자식들이 아버님 기름보일러 넣어 드렸으니 기름 풍풍 때고 써세요라고 말해도 그 옛날 어렵게 일제시대와 6.25를 넘어오신 어르신들을 보면 기름보일러의 기름이 그 추운 혹한이 다가와도 기름 한 방울 안 떼시고, 방안에 오히려 냉기가 가득하고 이인용전기장판도 커다며 불을 반만켜시는 어르신들을 본다.물론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내가 나중에 아버님의 연령에 도달했을 때 아버님의 반 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반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감히 제가 이렇게 이런 상황들을 감히 주제넘게 글로 올리는 이유는 오늘의 나를 비롯한 우리들 젊은 세대도 과거의 어른들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조금이나마 기억하며 우리도 자녀들에게 좀 더 알뜰하고 검소한 생활로 아이들을 다독여야 우리나라의 후손들의 앞날에 무궁무진한 발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감히 이 글을 용기내어 올리오니 부디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